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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 조직폭력담당 검사가쓴 양은이파,서방파 전쟁 이야기 [퍼옴]

무늬송 2013. 11. 29. 11:35

70~8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3대패밀리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이 있을것이다. 양은이파, 서방파, OB파

왜 이들 조직을 3대패밀리라 불렸냐면 전국을 3등분으로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3대패밀리에서도 양은이파가 조금더 많은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조양은에 자서전을 보면 추종세력만 봐도

순천시민파,전주월드컵파,국제PJ파 수원 남문파 북문파 군산 백악관파

안양타이거파 등등 전국구 조직들이 모두 양은이파 추종세력이었다.

추종세력이라 하면 양은이파 조직을 형님조직으로 인정하느 것이였다.

한창 잘나갔을때 조양은씨는 부하들만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조양은씨에 개인 보디가드만 4명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양은이파보다는 세력이 조금 뒤떨어졌지만 서방파도 3대패밀리로서

그어떤 조직도 함부로 할수 없는 조직이였다. TV에도 많이 나왔던

경찰수배중에 외제방탄차를 타고 도피했던 안토니파 안상민씨는

서방파 추종세력있였다. 안토니파는 3대패밀리를 제외한 조직중에

단연 최고였다. 종로,무교동,강남일부분이 안토니파 세력이였다.

안토니파 안상민씨는 400명이 넘는 조직원들에 오야봉이였다고 한다.

이둘조직이 서울과 경기도에 반을 나누어가졌다고 하면 OB파는 전라도 광주에서

부터 시작해 대구 동성로파,이리배차장파,전주 번개파 등등

OB파에 추종세력이였다. OB파는 서울과 경기권에 세력이 없었지만

전라남도와 북도 충청남도와 북도에 최고조직이였다.

이당시에 가장 발전이 된곳은 서울이였고 그다음이 경기도였다.

전라도와 충청도는 발전이 미미하였지만 그래도 그 엄청나게 넒은

도시를 단하나에 조직이 관리했다고하니 놀랄수가 없다.

영화친구에서도 나온 칠성파는 이당시에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이당시 칠성파는 부산에서는 독보적이였지만 칠성파를

따르는 추종세력도 없었고 부산에서만 유명한 조직이였다.

칠성파 보스 이강환씨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굳이 서울로 진출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만했어...이당시에 부산도 서울과 비교해도 발전이

덜된게 아니거든...항구도 끼고 있어서 제법 괜찮았지...전국에서 양은이파나

서방파가 유명하긴했지만 우린 그런거 신경안?어"

하지만 OB파와 칠성파가 전쟁을 했을때 칠성파는 엄청긴장을 하게되었죠.

전쟁을 시작한건 OB파가 먼저였습니다. 그이유는 상대적으로 전라도보다

발전이 잘된 부산을 장악해서 연고지로 삶을 생각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게

된거죠...이때 당시에 서진룸싸롱사건이 터져서 언론에는 보도가 안됐지만

관할경찰들은 초비상이였죠...먼저 OB파는 부하5명을 칠성파 본거지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칠성파보스 이강환씨에게 아주 간단한 요구를 했습니다.

오늘부로 조직을 없애고 이제부터 부산은 OB파가 장악한다는 것이였죠

이말을 들은 칠성파 조직원들은 그자리에서 OB파 조직원들을 무차별적

폭행을 가합니다.그리고는 봉고차에 태워 OB파 본거지인 광주 광천동에

있는 정형외과 앞에 이들을 내려놓고 도망을 가게 됩니다...

이사건에 분노한 OB파 보스 이동재씨는 자서전에서 이런얘기를 합니다

"가장 아끼는 부하들에 얼굴을 보고 참을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오늘내로 칠성파를 죽이지 못하면 내손으로 내가 죽겠다"

OB파는 즉각 조직원들을 소집했습니다. 추종세력 조직원들도 불러모았죠

대략 350명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이때 당시에 칠성파는 70명도 채안되는

조직이였습니다. 위협을 느낀 칠성파는 번개 오종철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오종철이라는 사람은 양은이파 조양은에 고향 선배이며

조양은이 형님으로 모신는 사람이였습니다. 칠성파 이강환씨하고는 친구사이였습니다.

오종철은 OB파에 전화를 걸어 중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OB파는 이미 돌이킬수

없다고 중재를 거부합니다. 결국 오종철은 조양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양은이파와칠성파과 오히려 OB파를 먼저 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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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계속

 

부~~~

그때 당시에 건달세계는 춘추정국시대였다. 한때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깡패소탕작전이 있었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였다.

지금시대에는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시절에는 법보다 주먹이였고

주먹보다 깡패가 우선시 되는 시대였다.

상대편 조직에게 습격을 받고 난자가되도 경찰에 일절 신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잔혹하게 보복을 했을뿐... 그시절에는 신고자체를 하는것만으로

양아치 3류건달 족보없는 건달로 불려지었다.

업주 사장들도 금전적으로는 피해를 봤지만 그만큼 막강한 힘을

행사해왔고 조직에 보스와 거의 동급으로 동생들에게 형님소리를

들었다. 흔히 말하는 빽이 생긴 것이다.

그때 당시에 전쟁이라고 해봤자 패싸움 개념이 아닌 상대편 구역에서

잠복해있다가 표적이 되는 조직원을 골라서 칼침을 넣고 게릴라 작전처럼

치고 빠지는 전쟁이였다.

습격을 받은 OB파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먼저 칠성파가 습격을 해올지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양은이파와 칠성파가 공조한 습격을

알아차린 OB파 보스 이동재씨는 더욱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OB파 보스 이동재씨도 서울로 진출을 여러번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걸림돌은 양은이파였다. 전쟁을 해서라도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쉽사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세월을 보냈다.

부하 4명이 칼침을 맞고 광주에 병원에 입원을 했다.

소식을 들은 담당구역 형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하들은 산에서 놀다가 멧돼지에게 당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눈치를 챈 형사들은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조양은 김태촌씨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동재씨도

경찰서에 가는 날이면 경찰서장실에서 조사를 받는다.

그만큼 막강한 파워가 있었다. 지금은 참 웃긴 얘기지만

군사정권시절에는 주먹이 곧 힘이되는 시대였다.

범죄를 저질러 교도서에 들어가는 날이면 교도소 한동을 통째를 주었다.

거물급 보스가 교도소에 온다는 소식은 보통 3~5일전에 미리 연락을 받는다.

교도소도 바짝 긴장하고 그안에 수감된 조폭들도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황제 교도소 수감자 라고 보도되었던 조양은씨와 김태촌씨는

교도소에 수감될 당시 핸드폰이며 담배며 술이며 마음대로 누리고 다녔다.

지금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사건이 나올것이다. 이건 한치에 거짓없는

실화이다.

OB파는 전면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무조건 5인1조로 다니기, 연장은 화장실에

갈때도 차고 다니기 수상한 냄새가 나는 놈들은 무조건 박살내기

나름 지침을 내렸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고 있던중 조양은이 이동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내용은 이제 슬슬 여기서 끝내자라는 내용이였다.

하지만 이동재는 우리가 당한만큼 복수하기 전에는 절대 이싸움은

끝나지 않을거라고 엄포를 했다. 조양은은 자서전 어둠속에서.....에서

그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동재가 많이 유명해졌지만 그건 나와 태촌이가

교도소에 수감될때 그렇게 된거야..내가 광주에 일있어서 내려가면

형님하고 달려오던 놈이 너무 건방져 진거야...교도서에 있다가 출소해보니

완전히 동재천하더라고...그리고 내가 2년 선배고...나를 형님으로 불르던 놈이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져서........이번참에 혼한번 내줄라고 한거지"

천하를 호령할것 같던 이동재도 이시절에 지금도 80년대 조폭사에서

빠지지않고 나오는 사건중 하나가 이동재 은퇴사건이다.


조양은은 특공대 5명을 광주로 보내 자고 있던 이동재를 난자했다.

그 일로 이동재는 은퇴아닌 은퇴를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이 부분. 즉 3대패밀리의 한 축이였던 전국구 보스 이동재가

단순히 난자를 당했다고 해서. 이민을 간건 아니였다.

이 부분은 언론이 잘못알고 있는 얘기이고, 그 당시 군사정권 시절에는

이런 폭력적인 깡패들의 뉴스가 나오면 보도통제를 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단순명료하게만 보도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국민들은 단순 이동재가 상대편

조직원의 칼을 맞고 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라고 알고있었고 지금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있을 것이다.

이동재가 난자를 당했어도 생명의 위험에 이르를 정도의 피해는 아니였다.

병원에서 1년정도 치료를 받으면 일상생활로 돌아갈수 있는 상처였다.

보스가 난자되자 OB파는 즉각 행동개시 들었갔다.

강경 부하들은 조양은의 목을 따야 된다고 외치기 시작했고 직접 자체적으로

암살조를 만들어 약 30명이 서울로 상경을 했었고, 암살까지는 아니여도

보스가 당한것 만큼은 반드시 돌려주자 라는 온건파 부하들 약 200명은

순차적으로 서울로 조양은의 난자하러 상경하기 시작했다.

강경과 온건도 아닌 중도 약 150명은 어차피 조양은을 제거하기는 힘드니

조양은이 더 힘들고 괴롭게 그의 가족을 그의 가족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제거해버리겠다고

서울로 상경했다.

첩보를 받은 조양은은 좌불안석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일반 조직의 보스를

혼내준게 아닌, 3대패밀리의 보스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본인도 어느정도 두려움이 있었다고

경찰에게 고백했다. 그당시 조양은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지 경찰에게 고백하기를

칠성파 조직원들까지 상경을 시켜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라고 말했다.

실제로 조양은이 여러번 습격을 받아 큰 화를 당할뻔 했다. 하지만 중학교까지 육상선수였던

조양은의 뜀박질을 따라잡을수는 없었다. 애꿎은 조직원들만 피해를 봤다.

아무리 보스라고 해도 여러명의 상대편 조직원의 습격을 받으면 바로 도망가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전쟁아닌 전쟁이였다. 약 400명의 OB파 조직원들이 살기를 품고 조양은을 암살한다는

소문이 전국 각지의 조직들에게 들려졌고, 경찰내에서도 어느정도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동재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OB파 조직원들로 둘러쌓여있어다.

역으로 조양은이 또다시 특공대를 보내 보스를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 주위와 내부에 약 100명의 조직원들에게 경호를 맡겼다.

수술을 받고 어느정도 회복기에 들어간 이동재는 간부들을 소집해 지금은 시기가 않좋으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때 조양은을 혼내주자 라고 간부들에게 명령했지만

간부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당시 그때의 뉴스를 접해본적이 있는 분이라면

매일매일 폭행사건의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성동구에서 폭행시비가 붙어 2명이 사망했다든지

강남에서 술취한 시민들이 패싸움을 벌여 3명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든지

영등포에서 눈을 째려본다는 이유로 길가는 시민 4명을 집단구타해 큰 상처를 입혔다든지

매일매일 크고작은 폭행사건의 뉴스를 접해본적이 있을것이다.

사실 그건 모두 OB파 조직원들의 소행이였다. OB파 조직원들이 양은이파 조직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폭행한 것이고, 또 반대로 OB파 조직원들도 꽤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동재는 다시 간부들을 불러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했지만 간부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형님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에게 똑같지 돌려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과잉충성이 화를 부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것이다.

충성심이 높은 간부들끼리 싸움이 발생한것이다. 형님의 의견을 따르자는 간부들.

아무리 형님의 명령이라도 조양은에게 똑같은 보복을 하기전에는 멈출수 없다는 간부들.

여기서부터 걷잡을수 없는 싸움이 발생한것이다. 간부들끼리도 서열이 있는데

OB파 2인자였던 부두목 홍성태는 형님과 자기의 명령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반기를 드는 서열 3위의 총 행동대장이였던 오치익에게 폭행을 행사한것이다.

몇일후 오치익을 따르던 간부들과 조직원들은 이동재나,홍성태같은 나약한 보스와는 함께갈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사실 OB파를 체계적으로 만든건 이동재였지만 그 이전에 이미 OB파의 전신은 광천터미널파였다.

광주 광천동 터미널을 근거지로 만든 조직이였다. 이 조직을 만든건 양수재 라는 사람인데

이 양수재라는 사람이 세력확장을 통해 지금의 OB의 세력을 만들었고, 상당히 과격한 인물이였다.

양수재라는 사람은 늘 조직원들에게 타지역 조직에게 피해를 당하고

습격을 받으면 반드시 1000배 보복으로 밞아죽여라.

라고 할정도로 과격한 사람이였다. 양수재와 김태촌 조양은은 모두 호남사람들이다.

양수재가 두 사람보다 6살이 더 많았다. 호남의 발전이 안되 해먹을게 없다며 서울로 상경한

김태촌과 조양은 이였지만 그 당시 소문으론 양수재가 호남을 거의 장악햇기 때문에

호남에서 조직을 재건한들 양수재의 조직과 마찰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그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양수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수있을것이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폐암에 걸려 사망하자 2인자였던 이동재가

조직을 이어받아 조직이름은 OB파로 변경했고 조직을 조금더 체계적으로 관리했을뿐만 아니라

충청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양수재의 시절을 그리워하던 오치익과 오치익을 따르던 조직원들은

이동재와 홍성태를 밀어내벼렸다. 사실 OB파 조직내에서도 늘 이동재와 홍성태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오치익이 경찰에 조사를 받았을당시 너무 온화한 성격때문에 늘 밑에 조직원들이 불만을 품었다고 말했다.

오치익과 그를 따르던 조직원들은 이동재와 홍성태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혔고 실행에 옮겼다.

우선 눈에 가시였던 홍성태를 무참이 난자해 은퇴시켜 버렸고 그의 가족을 협박에 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1000만원만 홍성태에 손에 쥐어줬다. 홍성태를 거지아닌 거지로 만들고 강원도로 내?아 버렸다.

하지만 이동재에게는 끝까지 최대한 예를 배풀었다. 만약 이동재가 온화한 성격이 아니라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치익과 그 조직원들은 이동재의 온화한 성격만 빼고는 그를 늘 존경했고

늘 높은 충성심으로 복종했다. 오치익과 부하들은 병실에 누워있는 이동재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제 일은 끝났다며

형님을 끝까지 모시지 못한다며 큰절을 하고는 미국행 티켓과 현금 20억을 이동재에게 건네고

그만 한국을 떠나달라고 부탁했다. 이동재 본인도 알았을 것이다. 이미 기울어진 상황을 되돌릴수 없다는걸.

이동재는 그렇게 해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된 것이다.

이동재는 오치익에게 미국으로 떠나기전 한가지 부탁을 했다.

OB파 조직이 해체되기 전까지는 조직명을 바꾸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실 OB파라는 조직이름은 이동재가 양수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이름이였다.

양수재는 늘 우스갯소리로 내가 죽으면 조직이름을 OB파로 변경하라고 말했다.

부하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양수재는 고아라 부모도 없고 미혼이라 자식이 없어 늘 외로웠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외로움을 달래려고 늘 마시던 술이 OB맥주였다.

양수재는 늘 OB맥주는 자기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가장 친한친구 라고 말했다고한다.


오치익은 추후 경찰에 살인교사죄로 잡혔을때 형님을 그렇게 만든 조양은을 제거하지 못하고

감방에 들어가는 내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다. 라고 까지 말해 형사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정도였다.


오치익 없어진 OB파는 그야말로 고삐풀린 망아지였다.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두툼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결국 OB파는 구OB파 신OB파 광주 무등산파로 나누어졌다.

3대패밀리에 한축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일이 지나고 몇년후 이른바 3년전쟁이라는 큰사건이 터졌다.

조양은이 형님으로 모시고 있던 번개 오종철을 김태촌이 불구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숙명처럼 3년간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야인시대에도 나왔던 천안불곰 조일환씨가 여러번 중재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양은이파와 서방파는 3년동안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

어느 호텔에 서방파 조직원들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양은이파

조직원들이 달려가 칼침을 놓았고 반대로 양은이파가 어느 호텔에 있다는

첩보를 들으면 서방파가 칼침을 놓았다.

조양은이나 김태촌이나 전국구 보스이지만 교도소 생활도 오랜기간 했다.

청송교도소에 있을때에는 같이 수감 생활을 했다.

그때 조양은과 김태촌은 화해를 했고 먼저출소하는 사람이 뒷바라지를

해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먼저 출소한 조양은은 약속을 어기고

서방파 본거지를 여러번 습격을했다. 조양은 자서전에서 "아무리

용서를 할려고 해도 내가 어릴적 부터 형님으로 모시던 형님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용서가 안돼지"라고 심경을 말했다.

뒤늦게 출소한 김태촌도 약속을 어긴 조양은에 양은이파를 습격하고

3년동안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 그당시에 조일환은 자서전 불의아들에서

한참 동생들이지만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고 말했다.

용팔이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용팔이 김용남씨는

김태촌씨와 고교시절 화신 8인조라는 써클활동을 했었다.

다방을 본거지로 두고 매일 싸움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그당시에 김태촌은 깡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처음은 같이 시작했지만 김태촌은 서울로 상경을 하고 용팔이 김용남씨는

전주파를 결성 전주파 보스가 된다.

영등포를 지배하던 대호파가 있다. 뉴스에도 나왔던 유명한 이상훈씨가 보스로

있던 영등포 사창가를 중심으로 활동한 유명한 조직이였다.

이조직만큼은 서방파와 양은이파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조직이였다.

하지만 대호파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

조양은과 김태촌보다도 족보로 따지면 선배인 이상훈은 두명을

자기보다 윗급으로 인정해주지않았었다.

조직원 20명과 이태원 캐피탈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먹고 있던중

반대편 룸에서 술을먹던 양은이파 조직원들과 시비가 붙게 된것이다.

그호텔을 관리하던 곳은 양은이파가 봐주고 있던 정남이파가 관리하던

곳이였다. 조직원들과 조직원들에 사소한 말다툼이 생겼고

그 현장을 본 이상훈은 양은이파 조직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양은이파 조직원들도 대호파 보스 이상훈에 얼굴을 안것이다.

족보로 따지면 대선배인 사람에게 대들수도 없던 것이다.

몇일후 그이야기를 들은 조양은은 이상훈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그때 때린 동생들에게 사과를 하라고 말했고

이를 거절한 이상훈에게 앞으로 조심하라고 말했다.

조양은은 부하들을 시켜 이상훈을 손봐주라고 말했다.

조양은의 사과를 거부한 이상훈은 자서전 코리아 마피아에서 두려움이 컸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3대패밀리 조직중에서도 단연 최고인 조양은의 조직원들을

무참히 폭행한것도 모자라 조양은에게 되려 역성을 냈기 때문이다.

이상훈은 이동을 할때나 어디를 갈때 부하들 10명을 대동하고 다녔지만.

결국은 조양은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조양은에게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서 조양은은 이상훈의 정강이를 걷어차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이상훈에게 맞은 부하들을 불러모아 맞은만큼

똑같이 때리라고 명령했다. 이상훈은 조양은에게 그래도 선배인 나를

용서해달라며 무릎을꿇었다고 한다. 결국 조양은 부하들에게 한 폭행명령을

취소하고 대신 이상훈에게 그때 폭행을 당한 조직원들에게 치료비 명목조로

2000만원을 주라고 말했다. 이상훈은 알겠다고 말했다.

조양은이 대선배로 모셨던 번개 오종철의 후배가 바로 이상훈이였다.

조양은도 오종철의 후배이다. 이상훈과 뿌리는 같지는 줄기는 전혀 달랐다.


조양은과의 일이 있고난 몇달후에

종로호텔에서 고향후배인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과 만나고 있을때였다.

안상민과 이상훈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안상민이 초창기 조직을 만들고

운영해나가면서 금전적으로 상당히 힘들어 했을당시 이상훈의 큰도움을 받았다고한다.

만약 이상훈이 없었다면 그때 당시의 안상민도 없었다며 늘 말했다.

안토니파가 관리하는 종로호텔에서 안상민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중에

이상훈은 조양은과의 일을 안상민에게 말했다.

화가 머리끝까지는 안상민은 자기가 대신 복수해주겠다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훈은 복수는 절대 안된다며 이상훈에게 신신당부했다.

이상훈은 자서전 "코리아마피아" 에서 그당시 이상훈도 여러차례 간부들과

양은이파에 대한 전면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100번을 생각해도

너무 무모한 싸움이였기에 포기한것이다. 라고 말했으며

안토니파의 조직이 소멸되는걸 원치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안토니파의 위세가 등등했다 하더라도 양은이파와의 전면전은 너무 무모한 싸움인걸

아는 이상훈은 안상민에게 끝까지 행동에 들어가지 말라며 말렸다고 한다.

예전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을 부를때 성 뒤에 "돈"자를 자주 불렀다.

예를들어 성이 박씨면 박돈, 김씨면 김돈, 이런식으로 불렀다.

안상민씨도 돈이 많은 시절이였기에 주위에 어울리는 사장들과 선배들이

안상민씨를 "안돈" 으로 불렀다. 그렇게 해서 조직이름이 안토니로 불려졌다.

안상민은 고민에 빠졌다. 정중히 선배로 모시고 있는 이상훈이 당한 수모를

참을수 없던것이다. 하지만 혼자의 힘만으론 버거웠단걸 본인 스스로도 알고있었다.

그래서 안상민은 김태촌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미 3년전쟁으로 조양은과 김태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단걸 안상민은 알고있었다.

조양은과 김태촌의 조직은 장소와 시간 구분하지 않고 늘 크고작은 싸움이 나던 시절이였다.

안상민에게 이상훈은 친구처럼 편히 지내는 선배였다. 또한 힘들때 두발벗고 도와준 은인이였다.

사적으로 봐도 목례인사만 할뿐. 조폭들의 전유물인 90도인사는 하지 않은 사이였다.

하지만 김태촌은 달랐다. 안상민이 김태촌을 만나면 늘 90도로 정중히 인사를 했고

늘 예의를 갖추웠다. 안상민이 조폭세계에서 존경하고 인정하는 선배가 딱 1명있는데

그 1명이 바로 김태촌이였던 것이다. 안상민은 조양은과 안양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같이

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90도 인사는 하지 않았다. 목례보다 조금더 정중한 인사만 했었다.

그 인사도 좋던 싫던 조폭세계 에서 선배이기 때문에 인사를 한것일뿐,

존경에서 인사한건 아니라 자서전에 쓰여있다. 

안상민은 김태촌에게 이상훈의 일을 설명했다.

그말을 들은 김태촌도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이상훈도 나름 전국구 조직의 두목이며

모두 번개 오종철의 후배란걸 김태촌도 알고있었다. 파는 갈라져있지만

그래도 어린시절 조직생활을 같이한 선배를 부하 조직원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런 수모를 줬으니 놀랄만도 하다. 안상민은 김태촌에게 이참에 연합작전을 펼쳐 양은이파의 현금창고인 디스코클럽을

박살내자라며 부탁했다. 김태촌도 그말에 동의했고 바로 다음날 실행에 옮겼다.


이 사건이 그당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외제차를 타고 도피하는 전국구 보스 사건에 시작이였다.

인간극장에도 나왔던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는 주먹대결에서

져본적이 없다고 한다. 양은이파 서방파 OB파가 연장으로 성공한

조직이라면 안토니파는 철저하게 주먹으로 전국구반열에오른 조직이다.

16살때 서산일대를 평정하고 서울로 상경해서 종로에 꼭지다방에서

잡일을하며 10대를 보냈는고 20살부터 본격적인 조직생활을했고

24살때 종로일대를 관리하던 이쁜이파를 주먹으로 밀어내고

종로에 강자가 되었다. 안토니파에 시작이였던 것이다.

화가난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는 서방파 행동대장 5명과 조직원

40명과 안토니파 행동대장 3명과 조직원 30명을 데리고 무교동

엠파이어호텔로 들어갔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발전이 잘된곳이 무교동이였다.

그 당시 강남도 속속들이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유흥쪽으로는

거의 전무했기때문에 서울에서 나름 논다는 젊은이들은 무교동 유흥가로 모였다.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디스코클럽을 물으면 주저없이 무교동 엠파이어호텔을 말할것이다.

엠파이어 호텔지하에는 엠파이어 클럽이 있었고 평일에도

줄을서서 들어가야할만큼 엄청나게 성업중인 곳이였다.


그곳에 주류납품권과 관리권을 양은이파가 가지고 있었고

그호텔 5층에 양은이파가 직접운영하는 일정건설 사무실이 있었다.

대략 100명정도가 봉고차 20대에서 내렸고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엠파이어호텔 로비로 쳐들어갔다. 쇠파이프와 야구망방이로

보이는 물건은 모조리 박살내었다. 로비를 지키고 있던 양은이파

조직원들은 당황한 나머지 뒷문으로 도망갔다. 나이트 클럽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 손님들을 제외한 나머지 물건과 값비싼 스테레오 오디오

DJ박스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20분이라는 시간에 엠파이어호텔 로비와

나이트클럽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고선 일사분란하게 차에타 도망을 갔다.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에 자서전 거물에서  그때 당시를이렇게 집필하였다.

" 내가 선봉에서 100명정도가 로비며 나이트며 유리며 조각상이며

아무튼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은 다 부셔버렸어..그렇게 20분정도

정신없이 휘둘르고 그만 나갈려고 하는데 완전히 전쟁터가 따로 없더라고"

안상민은 김태촌에게 전화를 걸어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니

형님조직도 그렇고 우리조직도 대비를 해놔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필 엠파이어 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 부장 검사가 술을 마시고 있어서

사건은 엄청 복잡해졌다. 본의아니게 검사는 쇠파이프로 팔을 맞아

팔에 금이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당시에 부장검사에 파워는 지금 부장검사

와는 하늘과 땅차이에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즉각 사건에 배후를 조사해보니 사건에 배후가 안상민씨로 밝혀졌고

안상민씨에는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그시절에 대통령전용차로 타고다니던 차량은 벤츠 500모델이였다.

하지만 안상민씨는 벤츠 550모델에 방탄차를 주차량으로 타고다녔다.

그러던중 외국 방탄자를 타고다니는 전국구 보스라는 내용이

뉴스며 신문에 도배가 되었다. 형사들만 안상민씨를 잡으려던게

아니였다. 양은이파도 추종세력과 전조직원에게 안상민을 보는즉시

난자해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렇게 한달정도 시간이 지났을때

안상민씨 사건을 담당했던 부장검사가 양은이파 자금책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사실이 뉴스에 알려졌다.

내막을 보면 양은이파가 부장검사에게 금품을 주었고 안토니파 조직을

없애달라는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당시 안토니파는

노른자중에서도 최고 노른자만 관리하던 조직이였기때문이다.

규모면으로는 양은이파보다는 한참아래지만 실속면에서보면

양은이파와 동급위치였다. 부장검사는 체포되어 직위해제와 더불어

1년6개월형을 받았고 금품을 건넨 양은이파 자금책은 2년형을 받았다.

제법 운좋게 부장검사사건에 묻혀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는 도피 3달만에

다시 종로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명수배는 풀린 상태였다.

안토니파가 엠파이어호텔을 공격할당시 선봉은 안상민씨가 맡았고

조직원을 소집 주도적으로 공격한건 행동대장 조영철이라는 조직원이

맡았는데 조영철이 경찰에 자수를 한것이다. 조영철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당시에는 형님대신 동생들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형님대신 교도소에 들어가는 동생들은 출소후에

제법 조직에서 높은 위치에 오를수가 있었다. 또한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밞고

올라간다고 표현하기도했다. 동생들만 200명이 넘는 안상민씨가 조영철을 지

목한건 안상민에 자선전에서도 엿볼수가 있다. "지금도 줄을 잘타야 된다고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엄청 심했어...동생들은 몇백명이지만 다 보스하고

다 행동대장하면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겠어...키워주고 싶은 놈만 교도소에

보내는거야...선택받은 놈이지...윗급에서 인정해주었다는 얘기자나..."

그렇게 교도소에 수감후 출소하면 최소 룸싸롱 관리권을 선물로 주었다.

조양은씨나 김태촌씨 이동재씨 모두 형님대신 교도소에 들어가

수감생활을 3년넘게 한적도 있었다. 그만큼 형님대신 교도소에 들어간다는건

나름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라고도 할수있다.

3대조직중에서도 단연 최고인 양은이파에게 전면전을 선포한거나 다름없었다.

조양은은 분노했고 즉각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안토니파와 서방파가 관리하는 주요 업소들을 타켓으로 정하고

무참히 보복했다. 또한 조직원들도 무참히 폭행했다.

그런 전쟁이 계속 반복되었다. 안토니파와 서방파 조직원들도

양은파가 관리하는 업소를 공격해고 조직원들도 공격했다.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없었다. 추후에 송도나이트클럽사장 폭행사건으로

김태촌이 붙잡히면서 이번일의 전모가 ?혀졌지만 약 4년동안은 경찰들도 전혀 모르던 시절이였다.

매일매일 싸움이 났지만 피해가 심한건 서방파와 안토니파였다.
 
양은이파와 서방파의 조직원수는 비슷했다. 안토니파는 100명정도 부족했다.

하지만 양은파에게는 즉각 동원할수 있는 추종세력이 있었고 그 추종세력의 조직원들을

서방파와 안토니파가 연합한다해도 전혀 감당할수 없던 것이다.

3대조직은 전국 3대 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규모로는 양은이파가 조금더 위에 있었지만

서방파도 독보적인 3대조직중 하나였다. 서방파는 500명이 넘는 조직이였다.

또한 3대조직을 제외하고 단연 최고인 안토니파도 400명이 넘는 조직이였다.

1:1 규모면으론 쉽게 제압할수 없는 조직이였지만

양은이파에게는 엄청난 추종세력이있었다. 조양은의 한마디에 그당시 한참 전쟁을 벌였던

수원 남문파와,북문파가 일시적으로 연합해 양은이파를 도왔을 정도이다. 두 조직의 조직원의 수는 200명이 넘었다.

또한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큰 안양타이거파의 조직원 140명 조양은의 전화 한통화에 조양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외에도 의정부세븐파 파주스포츠파 포천여우파 신림동이글스파 고양식구파 등등 십여개의 조직들이

모두 양은파의 추종세력이였고 모두 서방파와 안토니파의 전쟁에 동원된 조직이였다.

숫적 열세에 부딪힌 서방파와 안토니파도 즉각 지방의 추종세력을 서울로 불러모았지만 숫적으로

양은이파에게 대항하기엔 부족했다. 안상민씨는 자서전 거물에서 이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양은이파와 일대일로 붙으면 불리하겠지만 해볼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고 또 서방파와 연합을 했기

때문에 전혀 두려울것이 없었다. 물론 양은이파도 추종세력을 동원할건 알았지만

추종세력이 이렇게 많은줄은 몰랐었다. 양은이파의 추종세력이라곤 안양타이거파 정도밖에 없는줄 알았다.

라고 쓰여있다. 즉 뚜껑을 열어보니 양은이파의 추종세력이 너무 많은것이였다.

서방파도 놀랐다고 한다. 김태촌도 이렇게 많은 추종세력이 있을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었다.

김태촌 본인도 기껏해야 3~4개 군소조직의 추종세력이 있을거라고 예상했다고 경찰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양은이파의 추종세력은 군소조직이 아닌 그 지역을 대표하는 대표조직이였다.

머릿수로 밀리니 양은파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였다.

똑같은 수의 조직원들이 피해를 입어도 양은이파의 조직원들은 서방파와 안토니파가 연합한 조직원들의

배가 넘는 인원이 있었다. 이런식으로 싸움이 난다면 조직자체가 와해될거란 두려움을 느낀

서방파와 안토니파는 전주로 나려가 전주파보스 용팔이 김용남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태촌과 김용남은 고교동창이고 학창시절에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조양은과 사이가 안좋은 김용남은 조직원 200명을 서울로 보냈다.

매일매일 싸움이 일어났다. 크고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전쟁아닌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건 시민들이였다. 여론도 악화되었다. 조폭들 ?문에 살수가 없다며 정부앞에서 단체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 당시 경찰도 조직과 조직사이의 충돌이겠거니 생각했지만 4년후 김태촌에게 사건전말을 들은 경찰들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폭력사건이 일어났고 아무 죄없는 행인들까지 크고작은 피해를 입기 시작했고

도로 한복판에서 일어난 칼부림 사건으로 애?은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었났다.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다.

이 뿐만 아니였다. 상대편 업소에서 싸움이 일어나자 상황이 불리하자 인근 상점으로 도망간 상대편 조직원들을

잡기위해 인근 식당이며 슈퍼마켓을 난장판으로 만드는건 기본이였다. 매일매일 조폭들의 싸움이 뉴스에 나왔다.

그 수법에 일반 국민들은 두려움을 떨었다. 불구를 만드는건 기본이였고

심지어는 칼로 난자한 상대편 조직원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이르렀다. 국민들은 깡패가 무서워 일찍 귀가하는게

유행아닌 유행이였다. 이 당시에 서해바다에 시체 3구가 떠올랐다. 시체를 인양하고 나서 보니

칼로 무참히 난자당한 시신이였다. 이 사건은 서방파 조직원들이 양은이파 조직원들을 살인한 사건이였다.

조양은은 김태촌과 안상민이 직접 찾아와 무릎을 꿇기 전에는 이 싸움은 절대 안끝날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김태촌과 안상민은 그런 수모를 당할바에는 그냥 죽는게 낫다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김태촌과 안상민은 불리해지는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한명한명의 조직원이 소중하던 시기에

전주에서 동원된 전주파 200명의 조직원은 당시 전주파와 라이벌 관계인 목포파와 전쟁으로 인해

급히 다시 전주로 내려갔다. 김태촌과 안상민은 조양은에게 협상을 시작했다.

무릎을 꿇는건 죽어도 못하겠다며 대신 정중히 사과를 하고

또한 본인들이 관리하는 업소를 각각 5개씩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을 거부하면 죽는한이 있더라도 전쟁은 끝나지 않을것이다 라며

되려 엄포를 놓았다.

위에도 설명했지만 이당시 싸움을 가장 빨리 끝낼수 있는건 경찰에게 신고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당시 경찰에 신고하는것 자체만으로 3류건달. 족보없는 건달로 불려졌다.

전국구 조직이 상대조직과 싸움에서 밀리자 경찰에 신고했다는 얘기가 나오면 그 자체만으로

조직에게는 씻을수 없는 치욕이였다.   

만약 그당시 조양은이 둘의 조건을 받아줬다면 이 전쟁은 끝났을것이다.

하지만 조양은은 이미 상황이 양은이파로 기울인 마당에 고작 각각 5개업소를 갖자고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전쟁을 계속했겠냐며 둘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미 서방파와 안토니파가 관리하는 업소 몇개가 양은파의 수중에 떨어졌다.

더 전쟁을해서 서울에서 서방파와 안토니파를 밀어내는게 조양은의 꿈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욕심이였다. 매일매일 굵직한 깡패들의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즉각 깡패와의 전쟁을선포했다. 조양은이 김태촌과 안상민의 조건을 거부한지 3달후에

깡패와의 전쟁이 선포된것이다. 군인과 경찰의 대대적 합동작전으로 인해 대부분 조직들은 와해되거나

두목들은 구속이 되었다. 불똥은 지방조직에까지 번졌다. 서울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부산지역 칠성파 두목 이강환까지도 구속되어버린것이다.

아무튼 이렇게해서 조양은과 김태촌의 전쟁은 종료되었고 둘모두 구속수감되었다.

안상민도 마찬가지로 구속되었다. 하지만 김태촌은 3년만에 출소를 하고 다시 1년있다

송도나이트 호텔 사장 폭행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수사를 하던 형사들은 건수를 올리기 위해

김태촌을 회유했고 조폭범죄를 말하면 감형할수 있게 도와주겠다 말했고

김태촌은 양은이파와의 전쟁에 대해 사실대로 말해 최종 법정에서 4년이 감형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처 : 수다
글쓴이 : 악플달지말쟈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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